생각 연습

일체법무아, 명치를 짓누르는 고통조차 허상일 뿐

필쇄 2025. 6. 22.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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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치 아래 무거운 돌덩이가 올려진 듯한 통증이 시작되었을 때, 나는 그것이 단순한 신체적 불편함이라고만 여겼다. 가슴뼈 아래 한가운데 오목하게 들어간 그 부위에서 시작된 아픔은 등까지 뻗어나가며, 마치 누군가 내 몸을 짓밟고 있는 듯한 감각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세친보살이 《대승백법명문론》에서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일체법은 무아(無我)이다. 무엇이 일체법이고 무엇을 무아라고 하는가?"라고 물었듯이, 나는 이 고통의 본질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명치에 새겨진 고통의 지도
명치는 인체의 급소라 불리는 곳으로, 식도와 위가 만나는 부위와 인접해 있어 소화기 문제가 발생하면 곧바로 통증으로 나타난다. 역류성 식도염, 담낭결석, 급성 췌장염 등 다양한 질환들이 이 부위에 고통을 새겨넣는다. 특히 식후에 나타나는 명치 통증은 위산이 식도로 역류하면서 발생하는 염증의 신호이며, 때로는 극심한 통증으로 인해 응급실을 찾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물리적 현상들 앞에서 《대승백법명문론》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세친보살은 일체법을 5위 100법으로 분류하면서, 심법(心法) 8개, 심소유법(心所有法) 51개, 색법(色法) 11개, 심불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 24개, 무위법(無爲法) 6개로 나누었다. 이 분류 체계에서 명치의 통증은 색법에 속하는 신체적 현상이지만, 그 통증을 인식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심법과 심소유법의 작용이다.

마음이 만들어내는 고통의 실체
《성유식론》에서는 "마음작용이란 마음을 발동근거로 하여 일어나고, 마음과 상응하며, 마음에 계속된 모든 법을 통칭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명치의 통증을 느끼는 순간, 우리의 마음은 그 감각을 수용하고(受), 그것을 괴로운 것으로 인식하며(想), 그에 대한 거부감을 일으킨다(思). 이러한 과정에서 촉(觸)이라는 마음작용이 근(根)과 경(境), 식(識)의 화합을 통해 일어나며, 이것이 수(受)의 소의가 되어 고통스러운 감각을 만들어낸다.

특히 《성유식론》에서 설명하는 신(信)의 마음작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信)의 본질적 성질이 심정(心淨)이라고 할 때, 이는 마음이 본래 청정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가 명치의 통증에 사로잡혀 있을 때, 우리는 그 고통이 실재한다고 믿으며,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 자체가 마음의 청정성을 가리는 장애가 될 수 있다.

유식학에서 말하는 "유식무경(唯識無境)"의 관점에서 보면, "인식만 있고 인식 외부의 대상은 없다"는 의미이다. 이는 우리가 명치의 통증이라고 여기는 것도 결국 우리 마음의 인식작용일 뿐, 그 인식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통증 자체'는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장식(藏識)이니, 전7식이니, 종자니, 현행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반성적 의식에 의해 선-반성적 의식을 분석한 결과물일 뿐이며, 반성을 중단하면 이 모든 것들은 의미를 잃는다.

무의미의 심연에서 발견하는 해탈
《대승백법명문론》의 핵심 교의는 아공(我空)과 법공(法空), 즉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이다. 인무아는 개체로서의 '나'가 실체로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하고, 법무아는 모든 현상이 고정된 실체를 갖지 않음을 의미한다. 명치의 통증도 마찬가지다. 그 통증을 경험하는 '나'도 실체가 없고, 통증이라는 '현상' 자체도 고정된 실체가 없다.

이러한 깨달음 앞에서 명치를 짓누르는 고통은 그 의미를 잃어간다. 고통스러워하는 주체도 없고, 고통이라는 객체도 없다면, 무엇이 고통스럽다는 말인가? 감산스님이 《대승백법명문론논의》에서 "참선 수행을 하는 사부대중을 위한 수행 지침서"라고 했듯이, 이러한 통찰은 단순한 철학적 사변이 아니라 실제 수행을 통해 체험해야 할 진리이다.

명치의 통증이 등까지 뻗어나가며 온몸을 짓누를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 고통에서 벗어나려 한다. 병원을 찾고, 약을 먹고, 생활습관을 바꾸려 노력한다. 이러한 노력들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동시에 그 고통의 무자성(無自性)을 통찰할 수 있다면, 우리는 고통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도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있게 된다.

《성유식론》에서 설명하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의타기성(依他起性), 원성실성(圓成實性)의 삼성설(三性說)에 따르면, 명치의 통증을 '나의 고통'이라고 집착하는 것은 변계소집성에 해당한다. 통증이 여러 조건들의 상호작용으로 일어나는 현상임을 아는 것은 의타기성의 관점이다. 그리고 그 통증조차 본래 공하여 차별이 없음을 체득하는 것이 원성실성의 깨달음이다.

고통 너머의 청정한 마음
역설적이게도, 명치의 통증이 가장 극심할 때 우리는 가장 깊은 진리에 가까워질 수 있다. 감산스님이 강조했듯이 "참선 수행자는 반드시 유식을 공부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고통의 순간에도 마음의 작용을 명확히 관찰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통증이라는 감각이 일어나는 순간, 그것을 받아들이는 수(受)의 작용이 일어나고, 그것을 고통으로 인식하는 상(想)의 작용이 뒤따르며, 그것을 거부하려는 사(思)의 작용이 연쇄적으로 일어난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을 명확히 관찰하면서도 그것에 휘둘리지 않을 때, 우리는 마음의 본래 청정성을 발견할 수 있다. 《성유식론》에서 말하는 신(信)의 마음작용이 심정(心淨)을 본질로 한다는 것은, 우리 마음이 본래 어떤 번뇌나 고통에도 물들지 않는 청정한 본성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명치를 짓누르는 무거운 감각, 등까지 뻗어나가는 아픔, 이 모든 것들이 일어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도 마음의 본성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마치 맑은 거울이 온갖 모습을 비추면서도 그 무엇에도 물들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온갖 고통을 경험하면서도 본래 청정함을 잃지 않는다.

무의미 속에서 발견하는 궁극의 의미
《대승백법명문론》에서 "일체법무아"를 선언할 때, 이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허무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고정된 실체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남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해탈의 메시지이다. 명치의 통증도 마찬가지다. 그 통증 자체를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통증에 대한 우리의 집착과 거부감을 내려놓는 것이다.

통증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받아들이고, 사라지면 사라지는 대로 놓아버린다. 그것을 '나의 통증'이라고 소유하지도 않고, '나를 괴롭히는 적'이라고 적대시하지도 않는다. 단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으로서 관찰할 뿐이다. 이렇게 할 때 비로소 우리는 고통의 무의미성을 체득하게 되고, 동시에 그 무의미성 속에서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유식학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결국 우리 마음의 현현이다. 명치의 통증도, 그 통증에 대한 두려움도,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도 모두 마음의 작용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마음 자체는 무엇인가? 그 마음의 본성을 직시할 때, 우리는 통증도 무통증도 모두 마음의 청정한 본성 위에 일어나는 파도와 같음을 알게 된다.

결국 명치를 짓누르는 듯한 통증, 등까지 뻗어나가는 아픔, 이 모든 고통들은 우리로 하여금 더 깊은 진리를 탐구하게 만드는 방편일 수 있다. 《대승백법명문론》과 《성유식론》의 가르침을 통해 보면, 고통의 무의미성을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평안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고통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고통이 있든 없든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경지이다. 이러한 깨달음 앞에서 명치의 통증은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는 적이 아니라, 깨달음으로 이끄는 스승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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