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연습

진여일심과 고통의 소멸: 대승기신론과 금광명경을 통해 본 현대인의 삶의 갈등

필쇄 2025. 4. 23.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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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끊임없는 갈등의 연속이다. 보상 체계의 불공정함에 분노하고, 과도한 업무 압박에 지칠 때, 우리는 스스로를 ‘된 사람’과 ‘못된 사람’으로 구분짓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적 사유는 오히려 마음의 먼지를 더욱 쌓아올린다. 대승기신론이 말하는 **진여일심(眞如一心)**과 금광명경의 고통 소멸 사상은 현대인의 내면 갈등을 해소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보상 체계의 불공정과 마음의 동요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가져간다”는 속담은 노력과 결과의 괴리를 비유한다. 업무 현장에서 열심히 일한 이보다 권력이나 관계를 가진 이가 더 큰 이익을 취하는 모습은 진여(眞如)의 본성이 가려진 상태다. 대승기신론은 망념(妄念)이 쌓일수록 진심(眞心)이 흐려진다고 설명한다. 불공정함에 대한 분노는 망념의 일종으로, 오히려 자신의 내면을 어지럽히는 독이 된다.

금광명경은 “탐욕·성냄·어리석음을 모두 없애서 고요케 하오리”라고 말한다. 이는 외부의 불공정을 바로잡으려는 시도보다 내면의 망념을 걷어내는 것이 우선임을 시사한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무의미한 분노에 에너지를 소모하기보다, 청정심(淸淨心)을 유지하는 것이 현명하다.

과도한 업무 압박과 수행(修行)의 길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속담은 과도한 업무 압박의 원인을 잘 드러낸다. 여러 이해관계가 얽힌 현대 사회에서 업무는 단순히 ‘하는 일’을 넘어 ‘감당해야 하는 부담’으로 변질된다. 금광명경은 “한량없는 오랜 세월을 이 세상에 머무르면서 바른 법문을 연설하여 중생에게 이익을 주네”라고 강조한다. 이는 업무 자체를 고통으로 보지 않고, 보시(布施)의 차원으로 승화할 것을 암시한다.

주리반특의 이야기는 수행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지적장애로 놀림받던 그가 청소를 통해 아라한의 경지에 이른 것은, 단순한 반복 행위가 삼매(三昧)로 이어질 수 있음을 증명한다. “쓸고 닦아라!”라는 부처의 가르침은 현대인에게도 적용된다. 업무를 수행(修行)으로 여기고, 매순간에 집중할 때 비로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된 사람과 못된 사람: 이분법의 허구
사회는 흔히 ‘된 사람’과 ‘못된 사람’을 구분한다. 그러나 대승기신론은 일체중생이 진여일심을 구비했다고 선언한다. ‘된 사람’이란 망념이 적은 이이며, ‘못된 사람’은 망념에 휩싸인 이일 뿐이다. “대낮의 올빼미”처럼 본질을 보지 못하는 이는, 자신 안에 잠든 부처의 씨앗을 외면하는 자다.

금광명경은 “모든 부처님이시여, 이제 마땅히 증명해 주시고”라고 간청한다. 이는 스스로의 진여를 깨달을 때 타인의 인정이 필요 없음을 뜻한다. “말로는 못할 말이 없다”는 속담처럼, 남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때 진정한 자아를 만날 수 있다.

멍청함이라는 편견과 지혜의 탄생
“주는 떡도 못 받아먹는다”는 속담은 멍청함을 조롱하지만, 대승기신론은 불성(佛性)이 모든 이에게 내재함을 강조한다. 주리반특이 청소로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단순한 행위라도 정성스럽게 수행하면 지혜가 열린다. 이는 “게으른 선비 책장 넘기기”와 대비된다. 표면적 지식보다 정진(精進)이 진정한 지혜를 낳는다.

금광명경의 “쇠북 소리는 이들에게 모든 고통을 없애 주리”는 구절, 즉 외부의 소음이 아닌 내면의 청정함이 고통을 해소함을 상기시킨다. 멍청함이란 편견은 타인의 기준에 불과하다. “묻지 않는 당신은 바보”라는 속담처럼,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묻는 용기가 진정한 지혜의 시작이다.

맺음말
삶의 갈등은 끝이 없지만, 그 안에서 평안을 찾는 길은 있다. 대승기신론의 진여일심과 금광명경의 고통 소멸 사상은 외부 조건에 휘둘리지 말 것을 당부한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속담처럼, 문제의 본질에서 눈을 돌리지 말고 내면의 청정함을 키워야 한다. 주리반특이 빗자루로 마당을 쓸듯, 우리도 매일의 작은 수행으로 마음의 먼지를 걷어내야 한다. 진정한 보상은 공정함이 아닌 마음의 평화에 있으며, 된 사람과 못된 사람의 구분은 우리 안의 진여를 가리는 망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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