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억압의 무게와 비호감의 굴레
강한 자의 발아래 눌린 자는 발끝만 보인다는 옛말이 있다. 권력자에게 억눌린 이들은 종종 자신의 말을 숨기거나, 아예 내뱉지 못한다. 그들의 목소리는 작아지고, 표정은 굳어 져 비호감의 인상을 남긴다. 주변에서는 그를 차갑고 불편한 사람으로 치부하지만, 사실 그 냉정함은 오랜 침묵과 좌절이 만든 껍질일 뿐이다.
요한3서에서는 디오트레베스가 교인들을 억압하고 자기 뜻대로만 행한다는 기록이 나온 (요한3서 1:9-10). 권력은 때로 합리화된 폭력으로 변한다. 억압당한 이는 분노를 삼키고, 그 감정은 결국 자기 안으로 향한다. 하박국 선지자의 탄식처럼, 어찌하여 폭력을 외면 하시나이까?(하박국 1:2-4)라는 질문은 오늘날에도 계속된다.
2. 직설의 대가와 에둘러 말하는 문화
말 한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지만, 정작 진실을 말하는 이는 적다. 직설은 위험하다. 상대의 체면을 깎거나, 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돌려 말하고, 의미를 흐리며, 진실을 반쯤 죽인 언어를 사용한다. 이 문화는 갈등을 피하지만, 동시에 억압의 고리를 강화한다.
에둘러 말하는 습관은 권력자에게 편리하다. 진의를 파악하기 어렵게 만들고, 비판을 희 미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는 결국 소통의 부재로 이어진다. 하박국의 신앙적 고민처럼, 의인이 악인에게 삼켜지는 상황이 반복되는 것이다.
3. 자기파괴적 비관: 분노가 안으로 향할 때
억눌린 감정은 표출되지 못하면 내부에서 부패한다. 분노는 절망으로, 절망은 자기혐오 변한다. 개밥에 도토리라는 속담처럼, 억압당한 이는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기 시작한다. 요한3서의 디오트레베스 앞에서 무너진 공동체처럼, 권력의 불공정함은 개인의 정신까지 무너뜨린다.
하박국의 절규는 현대인의 외로움과 닮아 있다. 어찌하여 나에게 고통을 보게 하시나이 ?(하박국 1:3)라는 질문은 해답을 기대하지 않는 비통함이다. 권력 구조가 바뀌지 않는 , 개인의 저항은 무의미해 보인다.
4. 결론: 좌절의 미학, 또는 영원한 패배
억압과 회피의 문화는 결국 모든 것을 무력하게 만든다. 진실을 말할 용기가 없는 사회에서 개인은 스스로를 잠식한다. 하박국처럼 신에게 항변할 수도, 요한3서의 교인들처럼 연대할 힘도 없다면, 남은 것은 오직 타협이거나 자기부정뿐이다.
물이 깊어야 고기가 논다지만, 깊은 물은 동시에 익사할 위험을 품는다. 권력의 심연 앞 에서 소극적 저항은 허울뿐인 수동태로 전락한다. 결국 억눌린 자는 분노를 잊고, 체념 선택한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비극적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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