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도서 3:11)
이 성경 구절은 인간 존재의 이중성을 단번에 드러냅니다. 우리는 영원을 갈망하지만, 동시에 순간의 고통과 불완전함에 갇힙니다. 성공은 빛나는 기념비로 남고, 실패는 침묵의 그림자로만 기억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누락, 비교당함, 조롱, 위선, 수치심―은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단단한 질료입니다. 이 에세이는 상처의 파편을 주워 모아, 그 위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피어나는 과정을 탐구합니다.
누락: 빈 자리의 의미론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누락’의 감각을 압니다. 부모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순간, 친구들 사이에서 소외될 때, 사회가 정한 기준선 아래에 서 있을 때, 우리는 스스로를 ‘부족한 존재’로 낙인찍습니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속 오바 요조 역시 가족 사진 속 유일하게 웃지 않은 아이로,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빈자리를 안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누락은 채움의 시작입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고통 없는 인생은 의미 없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부재를 느낄 때, 비로소 존재의 깊이를 측량할 수 있습니다. 어둠이 없으면 별빛도 보이지 않듯, 누락은 삶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창의성과 연민의 씨앗입니다. 가난한 화가 반 고흐는 생전에 한 점의 그림도 팔지 못했지만, 그의 ‘부족함’은 후대에 색채의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우리의 빈자리는 타인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는 용기로 변모합니다.
비교당함: 경쟁의 미로에서 벗어나기
“성공은 기념되지만, 실패는 기억될 뿐이다”―이 말은 현대 사회가 신봉하는 잔혹한 계율입니다. SNS에서는 타인의 화려한 삶이 실시간으로 증명되며, 우리는 끊임없이 ‘평균’과 ‘우수’의 잣대에 매달립니다. 비교당하는 고통은 마치 유리 조각을 삼키는 것 같습니다. 조금씩 내부를 갉아먹지만, 외부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죠.
그러나 비교는 인간의 본질이 아닙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너 자신을 알라”는 명제를 삶의 근본으로 삼았습니다. 타인의 눈에 비친 자신이 아니라, 내면의 소리를 듣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한국의 시인 고은은 “산에는 꽃피는 계절이 있듯, 사람에게는 때가 있다”고 썼습니다. 누구도 피어나는 계절을 앞당길 수 없듯, 우리의 성장 리듬은 고유한 생물학적 시계를 따릅니다. 비교의 미로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나다움’이 피어납니다.
조롱과 위선: 가면을 벗는 용기
조롱은 사회가 약자를 통제하는 도구입니다. 학교에서 ‘다른’ 아이는 왕따가 되고, 직장에서 ‘틀린’ 의견은 무시당합니다. 인간 실격의 요조도 익살꾼 가면을 쓰며 조롱을 피했지만, 결국 가면 속에서 진짜 자신을 잃어버렸습니다. 위선은 더 교묘한 폭력입니다. 겉으로는 겸손을 말하지만, 내면에서는 경쟁과 시기를 키우는 모순―이것이 우리를 지치게 만듭니다.
그러나 진실은 가면 너머에서 싹틉니다.
독일의 철학자 야스퍼스는 “진리는 고통 속에서 탄생한다”고 말했습니다. 조롱받는 순간, 우리는 세상이 바라보는 ‘왜곡된 렌즈’를 깨닫습니다. 위선을 감지할 때, 우리는 진정성의 가치를 배웁니다. 가면을 벗는 것은 상처를 드러내는 두려운 행위이지만, 그 상처가 치유의 시작입니다. 영국의 작가 J.K. 롤링은 실직과 빈곤 속에서 해리 포터를 썼고, 그녀의 ‘다름’이 수천만 독자의 위로가 되었습니다.
수치심: 상처를 짊어지는 법
수치심은 가장 깊은 상처입니다. 실패한 사업가, 이혼한 남자, 낙제한 학생―사회는 이들에게 ‘낙인’을 찍습니다. 우리는 수치심을 숨기기 위해 더욱 완벽해지려고 애쓰지만, 그럴수록 내면의 균열은 커집니다.
그러나 수치심은 재탄생의 에너지입니다.
심리학자 브레네 브라운은 “취약성을 인정하는 것이 용기의 시작”이라고 말합니다. 실패한 기업가는 더 겸손한 리더가 되고, 이혼을 경험한 이는 사랑의 본질을 이해합니다.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고통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받는 방식은 선택할 수 있다”고 썼습니다. 수치심을 인정할 때, 우리는 타인의 상처에도 손을 뻗을 수 있습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상처 너머의 빛
전도서의 말씀은 이렇게 계속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종잡지 못하게 하시고, 오직 사람들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깨달을 수 없게 하셨다.” 우리의 고통과 실패는 ‘종잡을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 속 한 조각입니다. 다자이 오사무의 요조가 끝내 찾지 못한 구원은, 아마도 그가 상처를 인정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는 불을 훔쳐 인간에게 주었고, 영원히 간을 쪼이는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상처는 인간 문명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상처도 마찬가지입니다. 조롱, 수치심, 비교―이 모든 것들이 쌓여 새로운 빛을 발합니다. 실패는 기억될 뿐이지만, 그 기억이 모여 인류의 지혜가 됩니다.
흙으로 빚은 영원
우리는 흙으로 빚은 그릇입니다. 금가고 부서지기 쉽지만, 그릇 속에 영원을 담을 수 있습니다. 상처는 흙이 물레 위에서 형태를 잡는 것처럼, 우리를 ‘나’로 완성시키는 과정입니다.
조롱받은 청년은 타인의 아픔을 읽는 시인이 되고,
위선을 견뎌낸 여성은 진실의 편지를 씁니다.
수치심에 갇힌 이는 그 문을 열고 연대의 손을 잡습니다.
하나님은 때를 따라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하십니다. 오늘의 상처가 내일의 빛으로 피어날 때, 우리는 비로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의 깊이를 이해합니다. “너의 상처도, 넌 인간이다.” 이 선언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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